구이고 1세

묵상록

(Meditationes)


제1장. 진리와 평화에 관하여, 그리고 오직 진리를 통해서만 평화를 얻는 방법에 관하여.

진리는 아름다운 것처럼 한가운데에 놓아야 한다. 누군가가 진리를 꺼려하더라도 판단하지 말고 동정하라. 그러나 그대 자신은 진리에 이르기를 바라면서도 어찌하여 자신의 악덕을 책망받을 때 진리를 물리치는가? 진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겪는지 보라. 술꾼에게 "그대는 술꾼이다"라고 말하며, 음탕한 자에게도, 교만한 자에게도, 수다스러운 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말한다. 이것은 참이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미쳐 날뛰며, 진리를 전하는 자 안에서 진리를 박해하고 죽인다. 거짓이 얼마나 존경받는지 보라. 온갖 악덕의 종인 가장 악한 자들에게 "훌륭하신 주인님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달래어지고 기뻐하며, 그렇게 말하는 자 안에서 거짓을 공경한다.

용모도 아름다움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진리는 경배되어야 한다.

어떤 피조물이든 고귀하고 강력할수록 더욱 기꺼이 진리에 복종한다. 참으로 그것이 강력하고 고귀한 것은 바로 진리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것들이 그대를 찌른다면 어찌하여 다른 것들에게, 곧 진리에게 도망치지 않는가?

진리가 모든 역경보다 더 쓰게 느껴지는 까닭은, 개별 역경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쾌락을 공격하지만, 진리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고발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모든 색깔과 눈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였거나, 다른 육체의 감각을 통해 경험하였다면, 만일 모든 소문을 이야기하거나 듣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대가 경험하거나 들은 그 많은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자신의 불의를 통해서가 아니면 아무도 미워할 수 없다. 악인에게도 선을 바라는 것은 성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오직 진리와 진리에서 나오는 평화만을 사랑해야 한다.

진리의 봉사자는 자기가 봉사하는 것과 봉사를 받는 자를 사랑하라. 그리고 같은 것이 다른 이에 의해 자기에게 봉사될 때,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서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라.

진리를 말하는 그대의 이유가 사랑이 되게 하라. 치유하듯이 그리하라. 그리고 누군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대가 그를 동정하거나, 그를 사랑하지 않거나, 그가 경멸하는 것을 보잘것없이 여기는 것이다. 마치 병자가 치유의 약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진리에는 끝없는 평화가 뒤따르며, 천사들과 공유된다. 거짓에는 수고와 슬픔이 뒤따르며, 악마와 공유된다. 진리는 보호받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대가 진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진리는 그대 종류의 사람들에게 극히 쓰고 불쾌하다. 이는 진리 자체의 탓이 아니라 그들의 탓이다. 마치 밝은 빛이 약한 눈에 그러하듯이. 그러므로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대로, 곧 사랑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리를 더욱 쓰게 만들지 않도록 주의하라. 유익하면서도 쓴 약을 병자에게 주는 자비로운 의사가 잔의 가장자리에 꿀을 바르듯이, 달콤한 것이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치유하는 것이 같은 한 모금에 쉽게 삼켜지게 하라. 더욱이 그대의 전체 의무는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대가 진리를 진리 사랑에서가 아니라 타인을 해치려는 욕구에서 말한다면, 진리를 말하는 자의 상급이 아니라 모욕하는 자의 벌을 받을 것이다.

참된 빛이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 완전히 드러낼 때 그대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될지 보라. 이미 그대가 한마디 말로 그의 악 중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자가 그토록 괴로워하거든 말이다. 그때에 마음의 계획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다른 이를 비난하든, 다른 이에게 비난을 받든, 동일하게 죄를 짓는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그대는 진리를 나쁘게 받아들이거나, 악으로서 진리를 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를 채찍질하려는 자는 그대의 삶을, 곧 진리를 붙잡아 그것을 통해 그대를 치고 괴롭히도록 하라.

진리는 생명이며 영원한 구원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불쾌한 자를 동정해야 마땅하다. 그만큼 그는 죽어 있고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뚤어진 그대는 진리가 그에게 쓰고 참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진리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고 감탄하는 진리를 거짓이나 아첨을 말하듯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불쾌하기 때문에도 아니고, 기쁘게 하기 때문에도 아닌, 유익하게 하기 위해 말해야 한다. 진리가 침묵되어야 하는 것은 오직 해를 끼칠까 하여서이니, 빛이 약한 눈에 해를 끼치듯이 그러하다.

빵, 곧 진리는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하여 육체의 형상에 굴복하지 않게 한다.

복된 자는 그의 마음이 오직 진리의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만 움직이거나 감화되며, 그의 몸은 오직 마음 자체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이다. 이리하여 몸도 오직 진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마음에 진리의 움직임 외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몸에 마음의 움직임 외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몸에도 진리의, 곧 하느님의 움직임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평화를 위해 모든 것을 행하는데, 평화에 이르는 길은 오직 진리를 통해서이며, 진리는 이 삶에서 그대의 대적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그대에게 복종시키든지, 그대를 진리에 복종시키라. 그대에게 다른 것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경은 그대에게 평화를 갈망하도록 경고한다. 그러나 눈먼 그대는 그것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한 평화를 가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갈망한다.

어찌하여 그대는 타인에게서 그토록 불쾌한 것, 곧 분노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가? 그대는 그가 화를 내므로 화를 낸다. 오히려 화를 내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라. 분노가 그대에게 진실로 불쾌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피했을 것이다. 이것은 오직 평화를 유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연못은 물이 풍부하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물은 샘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대의 평화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평화의 원인인 다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평화는 그것이 비롯되는 것이 변하기 쉬운 만큼 약하고 기만적이다. 인간의 얼굴이 주는 쾌적함에서 비롯될 때 그 평화는 얼마나 하찮은가!

모든 사람은 안전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안전은 더 많이 방해받을 수 있을수록 그만큼 줄어든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다르게 될 준비가 되어 있을수록 더 많이 방해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그대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나는 그대에게 해를 끼치겠다. 그대의 평화를 빼앗겠다. 참으로 그대에 대해 악하게 생각하거나 말하겠다." 그대가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동요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보라.

세속적인 것들이 그대 평화의 원인이 되지 않게 하라. 그대의 평화는 그것들만큼이나 하찮고 부서지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평화는 짐승과 공유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평화는 천사들과 함께하는 것, 곧 진리에서 나오는 평화이게 하라.

평화와 행복을 위해 붙잡고 사랑하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멸시하라. 평화와 행복을 완전히 잃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평화는 그것이 거하는 영혼의 선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를 위해, 쾌적한 맛처럼 바라야 한다. 그것이 그대 안에서 너무나 크게 되어 악인조차 배제하지 않도록 하라.

"너희 마음이 괴로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 14:27). 이것이 참된 안식일이다. 이것을 경축하는 자는 유혹당하지도 않고 강제되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자기 권한 안에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자선을 베풀 수 있으니, 다른 이가 적절하다고 보는 대로 화를 내거나 달래어질 수 있다.

현세적 평화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마음의 불안을 낳는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가지고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평화가 없다.

그대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평화를 누릴 것이다.

모든 것이 유사함과 평화를 통해 존속하듯이, 비유사함과 불화를 통해 모든 것이 소멸한다.


제2장.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익한 불만과 죄의 겸손한 고백에 관하여.

진리로 되돌아감의 시작은 거짓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교정에 앞서 꾸짖음이 있다. 불쾌하지 않은 것은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항상 변화되어야 하므로,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을 느껴야 한다.

구원을 위해 그대가 기울이는 모든 돌봄에서, 자기 자신을 꾸짖고 경멸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의무나 치유책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그대의 조력자이다. 그는 그대가 구원받기 위해 하고 있었거나, 하였어야 할 바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자기에게서 나온 선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에게서 나온 것이라곤 오직 악뿐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감사도 빚지 않는다. 모든 악은 그대 자신에게서 온다. 그러므로 보복으로 큰 벌을 갚아야 한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쉽다. 짐을 벗으면서 가기 때문이다. 짐을 지면서 가야 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부인할 정도로 그대 자신을 가볍게 하라.

자기가 보잘것없음을 아는 자는 꾸짖음을 마치 자기 자신의 판단인 양 차분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칭찬은 자기 자신의 판단이 아닌 것으로서 물리친다.

누군가가 그대에 관해 악을 말할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그대가 아니라 그에게 해가 된다. 마치 금을 똥이라고 부른다면 금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대에 관해 말해진 것이 사실이면,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것을 말하는 자는 칭찬받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유익을 준다. 그대 자신에 관해 좋은 것이 말해질 때, 그대가 더 잘 아는 소문을 왜 전하는가? 오직 그대 자신만을 꾸짖으라.

각자 자기의 악덕을 피하라. 남의 악덕은 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옷과 관은 끊임없는 거짓이니,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나타내기 때문이다.

어떤 자가 도둑질한 것을 슬퍼할 때, 그로부터 생겨난 수치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라면, 그는 도둑질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입은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그는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벌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죄짓는 것과 벌받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죄 자체를 가장 참혹한 벌로 여기며, 그러므로 어떤 불의도 벌받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죄의 불의 자체가 큰 벌이며,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누구에게도 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설령 그로부터 다른 어떤 악이 뒤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악 위에 죄를 피하고 도망쳐야 한다고 판단한다.

만일 누군가를 미워해야 한다면, 그대 자신만큼 미워할 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그대만큼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꾸짖음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는다면, 꾸짖음 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는 개선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꾸짖음을 미워하는 자는 어리석다" (잠언 12:1). "그러나 징계에 순종하는 자는 지혜를 얻는다" (잠언 15:32).

고백에 관하여.

세리에게 구원으로의 귀환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바리사이가 교만하게 그의 면전에 내던진 것을 겸손하게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이것에서만 그대는 의롭다. 곧 자신의 죄로 인해 정죄받아 마땅함을 인정하고 선언할 때이다. 만일 자신을 의롭다고 한다면, 그대는 거짓말쟁이이며, 진리이신 주님에 의해, 그분에게 반대되는 자로서 정죄된다. 자신을 죄인이라 하라. 그리하여 진실한 자로서 진리이신 주님과 합치하여 해방될 것이다.

고백하는 자들을 위해 중재하여 그들이 용서받게 하는 것은 위대한 자의 일이다. 그러나 더 위대한 자의 일은, 아직 자기 죄과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인식하도록, 그리고 수치심 때문이든 죄과를 사랑하기 때문이든 고백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고백하도록 친절히 간청하는 것이다.

자기를 복수하려는 모든 이성적 영혼은 자기 자신이 두려워하고 혐오하며 악으로 여기는 것을 타인에게 가한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 진리보다 더 열심히 붙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더 격렬한 심정으로 가하는 악도 없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 관해 진리가 말해지는 것보다 더 혐오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로 적대자가 타인에 관해 말하는 것은, 그것을 듣는 자가 겸손히 인정하면 영원한 구원의 공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간음한 자를 간음한 자라고 부르는 자는 그에게 악으로서 말하지만, 간음한 자 자신이 자기 구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백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꺼이 이것을 받아들이되, 어떤 의도로 말해지는지가 아니라 자기에게 무엇이 말해지는지를 주의하라.

참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자이기를 사랑하며,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자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가 거짓을 말했음을 깨닫자마자 스스로 자기를 반박하며, 어떤 모욕이나 손해도 이것으로부터 그를 돌이키지 못한다. 진실한 자는 거짓된 자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만일 참으로 거짓된 자가 산다면 말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을 죽인다" (지혜 1:11).

그대가 숨기고자 하는 것, 곧 그대의 죄를 단죄하라. 그러면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지울 수 있으나 숨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숨겨진 것으로서 드러나지 않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감추어진 것으로서 알려지지 않을 것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그대는 병을 고치기보다 감추기를 더 좋아하는가? 그대의 몸의 병을 기꺼이 남에게 보여 동정을 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으면 자기를 비참하게 여기며 고통이 커지고 심지어 화까지 내듯이, 그대의 영혼의 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행하라.


제3장. 다섯 감각의 쾌락과 저열한 즐거움에 관하여.

두 가지 경험을 생각하라. 들이는 것과 내보내는 것이다. 어느 쪽이 그대를 더 행복하게 하는가? 하나를 통해 경험하는 것인가, 다른 하나를 통해 경험하는 것인가? 전자는 쓸모없는 것들로 짐을 지우고, 후자는 짐을 벗긴다. 각각이 무엇에 유익한지 생각하라. 이것이 모든 것을 경험으로 삼켜 버렸다는 뜻이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감각적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종류의 모든 것이, 희망에서든 현실에서든, 그대에게 어떤 행복을 가져다주었는지 보고, 미래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생각하라. 나는 말한다, 과거의 번영을 돌아보고, 그렇게 미래를 판단하라. 그대가 희망하는 모든 것은 소멸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그때 어찌하겠는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사랑하고 희망하라.

그대는 불에 타 없어질 나무에 색칠하려 한다. 그대가 소비하는 것을 아름답게 하려 할 때, 음식이든 의복이든 그러하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추위에 대한 옷이지 이런저런 색깔이 아니다. 배고픔에 대한 음식이지 이런저런 맛이 아니다.

짐승적 쾌락은 육체의 감각에서 오고, 악마적 쾌락은 온갖 교만과 시기와 기만에서 온다. 철학적 쾌락은 피조물을 아는 데서, 천사적 쾌락은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데서 온다.

덧없는 쾌락들 가운데 더 많이 기쁘게 하는 것들이 또한 더 치명적이다.

그대 자신이 만든 종류의 것들을 쫓으며, 그대가 파괴하는 것들, 곧 맛이나 다른 감각적인 것들에 영혼을 기울이는 것은 동일하거나 더 나쁜 어리석음이다.

"그분이 여러 지방에서 그들을 모으셨다". 곧 맛과 냄새와 육체적 접촉에서 거룩한 영혼들을 끌어내어 당신 안으로 모으신다.

이처럼 사람들은 참된 쾌락이나 행복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만이 참으로 존재하며,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이것을 시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신과 행복을 만드는 것이며, 행복이 존재하지 않고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돌보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색깔이나 맛에만 전적으로 몰두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추하고 어리석을지 보라. 그토록 많고 다양한 사물의 성질에 몰두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피조물이든 모든 피조물이든, 그 어느 하나보다도 더 우리의 하느님이거나 우리의 구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짐승과 같은 것들에서 기뻐할 때, 곧 개처럼 음욕에서, 돼지처럼 탐식에서, 그리고 기타 등등에서 기뻐할 때, 우리의 영혼은 그들의 영혼과 같아지는데도 우리는 전율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개의 영혼보다 개의 몸을 가지겠다. 그런데도 만일 우리의 몸이, 우리의 영혼이 음욕을 통해 개의 영혼과 닮아지는 것만큼이나 개의 몸과 닮아진다면, 누가 우리를 참겠는가? 누가 전율하지 않겠는가? 영혼이 존엄함 안에, 곧 하느님의 형상 안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몸이 짐승으로 변하는 것이, 몸은 인간으로 남은 채 영혼이 짐승이 되는 것보다 더 낫고 더 참을 만할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영혼이 몸을 능가하는 만큼 더 끔찍하고 탄식할 만하다. 이 때문에 다윗은 말한다. "지각이 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라" (시편 32:9). 이것이 몸의 닮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우스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음료처럼 무엇인가를 오직 더 큰 쾌락을 주도록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파멸을 위해 악마에게 협력하는 것이며, 칼을 갈아서 우리의 내장을 더 쉽고 깊이 관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서 더 많이 기뻐할수록, 더 심하고 깊이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제4장. 이 세상의 자녀들이 소멸할 것들에 대한 욕망과 사랑으로 인해 겪는 헛된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에 관하여.

인간은 기꺼이 육체와 허영에 대한 사랑에 스스로 얽히지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들의 파멸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으로 괴로워한다. 육체 자체가 빼앗길 때든, 자기 자신이 비난받을 때든 마찬가지이다. 소멸할 것들에 대한 사랑은 마치 쓸데없는 두려움과 슬픔과 모든 근심의 샘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강한 자에게서 해방하시되, 세속적 사랑의 사슬에서 풀어 주심으로써 하신다. 소멸할 것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떤 강한 자에게도 상처받을 곳이 없으며, 전적으로 침범할 수 없다. 오직 침범할 수 없는 것들만을 마땅히 사랑해야 할 대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그대 머리의 모든 머리카락을 자른다 해도, 아직 두피에 붙어 있는 것들을 건드릴 때가 아니면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다만 욕망을 통해 그대 안에 뿌리를 내린 것들을 누군가가 건드릴 때만은 예외이다. 이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많고 더 격렬한 슬픔을 낳을 것이다.

욕망을 완전히 소멸시키든지, 동요될 준비를 하라. 곧 마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슬퍼할 준비를 말이다.

인간의 영혼은 괴로워할 수 있는 한, 곧 하느님 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한, 자기 안에서 괴로워한다. 하느님은 원하지 않으면서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을 버릴 수는 있으나 잃을 수는 없다.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서도 해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대를 해방하신 사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많든지, 그 사물들은 그대를 위해 소멸하거나 그대가 그것들을 위해 소멸할 것이었는데, 바로 그만큼의 두려움과 슬픔과 비통의 고통에서 그분이 그대를 풀어 주셨다.

그대에게 들러붙어 그대를 더럽히는 육체의 외모나 형상이 소멸하는 동안, 하느님께서 그 선율을 이끄시는 가운데 음절이 정해진 시간에 소멸하듯, 그대는 괴로워한다. 자라난 녹이 긁어 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고하지 않는 것보다 더 수고스러운 것은 없다. 곧 수고가 비롯되는 모든 것, 즉 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멸시하는 것이다.

그대 종류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무리를 이루어 세상을 위해 수고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을 얻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마저 잃었는지 보라. 그러나 그대가 힘쓴다면, 모든 사람이 수고하거나 수고하였던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영혼의 어리석은 동요 자체가 비참함이다. 이것은 거의 항상 그대 안에 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죽음의 원인들, 곧 그대가 잘못 집착하였던 것들을 부패시킬 때, 그것들을 버리고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대는 여종을, 곧 피조물을 부끄럽게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주인, 곧 그대의 하느님께서 그녀에 대해 정당히 원하시는 대로 행하실 때 그대는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대는 큰 노래의 한 음절에 집착하였다. 그러므로 가장 지혜로운 노래하는 이가 노래를 진행할 때 그대는 동요한다. 그대가 홀로 사랑하였던 그 음절이 그대에게서 빼앗기고, 다른 음절들이 그 순서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대만을 위해 노래하시는 것이 아니며, 그대의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노래하신다. 뒤따르는 음절들이 그대에게 적대적인 것은, 그것들이 그대가 잘못 사랑하였던 음절을 밀어내기 때문이다.

음절이 노래에서 차지하는 것이, 세상의 흐름 속에서 각 사물이 장소나 시간에서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괴로워할 것이다. 열등한 것들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며, 그것들은 노래의 음절처럼 자기 순서대로 지나가기 때문이다.

역경이라 불리는 이 모든 것은 악인에게가 아니면 역경이 아니다. 곧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역경이다.

이런저런 사람이 세상을 위해 수고하는 만큼 하느님을 위해 수고하였다면, 그의 생일은 순교자의 그것처럼 경축될 것이다.

얼음에서 추위가 나오듯,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쓸데없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비참과 함께 영혼을 침범한다. 추위의 원인들을 제거하듯이, 두려움의 원인인 모든 것을 그대에게서 제거하라. 나는 장소에서가 아니라 영혼에서 제거하라고 말한다. 피할 수 있고 피해야 하는 것, 곧 죄 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피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피할 수도 있다. 곧 불의가 그러하다.

그대가 동요하고 괴로워하는 데 있어 사람들의 권한 아래에 얼마나 놓여 있는지 보라. 그들이 말로 혹은 생각이나 의견으로 그대를 비난하는 것이 쉬운 만큼, 그대를 동요시키는 것도 그만큼 쉽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대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요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들의 권한 아래에 있다. 누군가가 이것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그대는 마음의 상태로 인해 그렇게 노출되어 있다. 선한 것에서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대가 아니라 그들에게 해가 된다. 그때에는 그대의 선한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바꾸려 힘쓰라. 악한 것에서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자체는 그대에게 해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유익이 된다. 다만 그대의 악이 해가 될 뿐이다.

순교자들은 하느님께 말한다. "당신을 위하여 우리가 하루 종일 죽임을 당하나이다" (시편 44:22). 그대는 아무 하찮은 것들에게 말한다. "너희를 위하여 나는 하루 종일 동요한다."

그대 자신을 사방에서 억제하고 거두어 모으라. 변할 수 있는 것들의 소용돌이가 그대를 그것들 가운데에서 발견하여 괴로워하게 하지 않도록.

그대가 어떤 방식으로든 괴로워한다면, 두려움으로든, 분노로든, 미움으로든, 어떤 종류의 슬픔으로든, 그것을 오직 그대 자신에게만, 곧 그대 자신의 욕망이나 무지나 게으름에 돌리라. 그러나 누군가가 그대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것은 그의 욕망에 돌리라. 그대의 상처와 고통은 그대의 죄의 표지이다. 곧 하느님을 버리고 상처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사랑하였다는 것이다.

그대가 사랑하는 볼거리가 손상되면 슬퍼한다. 이것을 그대 자신과 그대의 잘못에 돌리라. 손상될 수 있는 것들에 집착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인간은 모든 악을 다른 것에 돌리는 데 너무나 익숙하여, 돌에 걸려 넘어지거나 불에 데이면 감히 하느님의 피조물 자체를 탓하고 저주한다. 그 피조물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허약하고 생명 없는 것으로서 마땅히 탓을 받을 것이지, 자기 자신의 약함의 비참을 탄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유모가 어린아이가 참새를 받으면 기뻐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참새를 받을까 봐 크게 두려워하며, 아이가 그것 때문에 기뻐하리라고 생각할수록 더욱 그러한 것은 분명하다. 확실히 모든 사람은 자기와 사랑하는 이들이 기뻐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모는 아이에게 이것을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큰 악처럼 그것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는가? 확실히 그녀는 아이가 기뻐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가 기뻐하리라고 아는 것을 빼앗는가? 어찌하여인가? 다가올 슬픔을 내다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슬픔의 원인이 바로 이 기쁨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확실히 안다. 그 뒤에 아이의 마음을 덮칠 슬픔은, 앞선 그러한 기쁨이 격렬하였던 만큼 더 무거우리라는 것을. 현재 기쁨의 크기로 미래 슬픔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이다. 이 행위에서 이 여인이 해야 할 것으로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가? 탄식이 뒤따르는 모든 기쁨은 역병과 독처럼 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들이 머무는 동안 현재에 어떤 달콤함을 가지는지가 아니라, 떠날 때 우리 안에 어떤 쓴맛을 낳는지를 주시해야 한다. 모든 세속적 기쁨이 그러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나는 같은 선견지명의 주의로 포도밭, 초원, 넓은 집, 밭을 소유하는 것을 피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금과 은, 어찌하여 사람들의 평판과 칭찬,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을 피하지 않겠는가? 오, 누가 늙었으면서도 어리석은 아이에게, 곧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전체 인류에게, 어떤 위대하고 가장 지혜로운 유모를 주어, 미래 슬픔의 씨앗인 그 기쁨들에서 그런 돌봄과 정성으로 빼앗거나 되돌려 부를 것인가? 그러나 온 세상에 이토록 큰 눈물의 신음이 어디서 오는가? 이 가장 자비롭고 가장 강력하신 유모가, 당신 자신을 통해서든 다른 방식으로든, 인류에게서 슬픔의 원인들, 곧 세속적인 것들을, 마치 아이에게서 참새를 빼앗듯이, 빼앗거나 주지 않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닌가.


제5장.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 대한 욕망, 사랑, 자랑에 관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참된 비참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것에 관하여.

두 가지가 동등할 때, 하나가 다른 것보다 커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자기 자신의 증가에 의하거나, 동반자의 감소에 의해서이다. 이 두 번째 방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군주와 권세자들은 다른 모든 이보다 더 크다고 기뻐하거나 그리 되고자 애쓴다—곧, 타인의 굴복과 감소에 의해서이지, 자신의 몸이나 정신의 향상이나 증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몸도 정신도 어떤 식으로든 나아지지 않으며, 다만 다른 이들이 쇠퇴하고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진보하고 성장한 것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만일 모든 것이 무(無)로 환원될 만큼 줄어들었다면, 이것으로 인하여 그대의 영혼이나 몸이 어떤 면에서 성장하겠는가?

벽돌을 만들고자 하는 자가 마당을 준비하여 그것들을 그 동안 놓아 두되—거기에 영원히 남겨 두려는 것이 아니라 마르면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함이다. 그리하여 그 마당은 어떤 특정한 벽돌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질 모든 벽돌을 위하여 동등하게 준비된 것이다—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시간이 다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시려고 이 인간 거주의 장소를 만드셨다. 그리고 도공이 어떤 것들을 치워서 새로 만든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하듯이, 하느님께서도 죽음으로—마치 이전 거주자들의 이동으로—뒤를 이을 자들을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신다. 그러므로 마음의 사랑으로 마당에 집착하면서, 자신이 어디로 옮겨질 것인지를 늘 염려하며 묵상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고 미친 자이다. 벽돌들이 옮겨질 때 그것을 부당하거나 가혹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의도로 놓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옮겨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미친 욕망으로 공동의 것,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되 무수한 미래의 거주자들을 위하여 공동으로 배정된 것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차지하는 자들—외에는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일에서 이에 못지않은 또 다른 광기를 보라: 이 벽돌들은 거의 모두 같은 크기인데도, 그 중 단 하나의 공간만으로 만족하는 것은 거의 없고, 오히려 가능한 한 많은 벽돌을 쫓아내거나 부수고서, 저마다 여러 벽돌의 자리를 홀로 차지하려 한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는 결코 받칠 수 없는 집을 받치는 데—그 재료로는 아무것도 받칠 수 없는데—혹은 받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버팀목 자체가 그것이 받쳐야 할 집만큼이나 많은 다른 버팀목을 필요로 하고, 그 버팀목들도 다시 그만큼을 필요로 하여 무한히 계속되는 그러한 집을 받치는 데 자신의 모든 주의와 시간을 바치는 자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삶이 그 집이요, 그대가 그것을 받치는 자이며, 버팀목은 현세적인 것들이니—이것들은 결코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으며, 받칠 수도 받쳐질 수도 전혀 없다.

긴 수명을 구하는 자는 긴 시련을 구하는 것이다. 땅 위의 인간의 생애는 시련이기 때문이다(욥 7:1).

하느님께서 당신의 벗이나 친족에게서 사랑하지 않으신 것—곧, 권력, 귀족의 지위, 부, 명예—을 그대는 그대의 벗이나 친족에게서 사랑하지 말라.

그대는 올가미를 먹고, 올가미를 마시고, 올가미를 입고, 올가미 위에서 잔다. 모든 것이 올가미이다.

그대는 사랑에 있어서, 쾌락에 있어서, 애착에 있어서 유배자이지—장소에 있어서가 아니다. 그대는 부패의, 정념의, 어둠의, 무지의, 악한 사랑과 미움의 영역에서 유배자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곧 이 현세의 삶을—사랑하는 만큼, 반드시 덧없는 것들을 그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으로, 이 삶과 그 양분을 경멸하는 만큼도 마찬가지이다.

이것 혹은 저것을 잃은 것이 그대에게 고통스럽다. 그러면 잃는 것을 구하지 말라. 보유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고 획득하는 자는 누구든 잃는 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비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이는 주로 어떤 한 가지를 사랑하여, 늘 거기에 주의를 고정시킨다. 그러나 그대는—무엇을? 보라, 모든 이가 마치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저마다 세상의 개별적인 부분을 움켜쥐고 그것에 몰두하거나, 아니면 여러 것들 사이에서 찢긴다—마치 두 조각 고기 사이에 놓인 개가 어느 쪽에 먼저 다가갈지 몰라 다른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듯이.

그대가 신뢰하거나 기뻐하는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 그대가 하는 짓을 한다면—그대는 그것들을 어리석다고 비웃거나, 차라리 망한 것이라 슬퍼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가 그토록 미쳐 있다면, 그대가 미치는 것이 과연 좋겠는가? 그대가 자기 자신을 그토록 더러운 채로 견딘다면, 왜 다른 아무나는 견디지 못하는가?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이 겪는 재난의 수만큼, 그대의 마음도 그만큼의 재난에 처하여 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나 그것이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참하고 어리석다. 우상 숭배자가 자기가 숭배하는 것이 소멸할 것이기 때문에만 비참한가? 그렇다면 그것이 소멸하지 않으면 비참하지 않을 것인가? 분명히, 그의 우상이 존속하는 동안에도 숭배자는 지극히 비참하니, 비록 몸은 건강하고 현세적 재화가 풍부할지라도 그러하다.

역경이 그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이미 비참하였음을 보여 주고 가르쳐 줄 뿐이다. 그러나 순경은 영혼을 눈멀게 하여, 비참을 덮고 증가시키되 제거하지는 않는다.

영혼이 어떻게 육체적인 것들에 사로잡히고, 사로잡힌 후에 고통받는지 보라—예컨대 어린아이에게서처럼. 참새를 보고 사로잡히며, 그것을 받아들이면, 참새 자체가 겪는 만큼의 재난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에 사로잡히기 전에는 어찌 안전한가? 기쁘게 하는 것들이 영혼을 붙들어 두어, 역경으로 벌을 받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배를 받아, 우리는 바람에 실려 다니며 마주치는 형상들의 교체에 따라 기뻐하거나 슬퍼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약함과 추함을 자랑하면서 어찌 자신의 강함이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겠는가? 말을 타면 자랑하고, 자기의 추함이 화려한 옷으로 가려지면 자랑한다—그러나 차라리, 자기 힘으로 직접 말을 지고 다니거나 적어도 말이 필요 없고, 자기 자신의 광채로 옷을 빛나게 하거나 적어도 옷의 장식이 필요 없다면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과 이와 유사한 것들은 그의 궁핍과 추함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이 있다면 얼마나 기꺼이 그것을 드러내겠는가, 모피든 어떤 종류이든 의복에 있어 남의 아름다움을 그토록 기꺼이 드러내는 마당에!

현세적인 것을 얻어 기뻐하는 자를 위하여 슬퍼해야 할 것이, 그것을 잃어 슬퍼하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는 것 못지않다. 둘 다 열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니, 곧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열병이다.


제6장. 칭찬, 영광, 호의에 대한 무익하고 비천한 욕구에 관하여.

그대가 인간의 평판이나 호의의 본성과 힘을 잘 안다면, 그것들을 위하여 조금이라도 수고하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받는 자에게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마치 색깔이나 다른 형상, 물체, 혹은 그것들이 깃드는 사물들이 그것들을 보기 흉하게 만들되 사물 자체에 아무 유익도 해도 끼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교도들이 태양과 달을 신으로 여긴 것이 그것들에 무슨 유익이 되었는가? 혹은 그대가 그것들을 피조물로 인식하는 것이 그것들에 무슨 해가 되는가? 그대가 그것들을 분뇨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것들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이 풀이나 저 나무의 본성과 힘을 살피듯이, 이러한 것들의 본성과 힘을 살피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대는 쉽게 이를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로부터 다른 모든 평판과 호의를 가늠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대는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된다: 곧, 어떤 사물에 바쳐져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들—앎, 호의적 사랑, 경외, 존경, 감탄 등이다. 이것들이 받는 자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것들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에게만 돌려져야 함을 보여 준다. 칭찬받거나 알려지거나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유익하다면, 누가 매일 일꾼을 고용하여 끊임없이 이것을 자기에게 보여 주어 쉬지 않고 진보하게 하지 않겠는가? 어느 어머니가 쉬지 않고 자녀에게 이를 베풀지 않겠는가? 누가 자기 옷, 전답, 짐승,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밤낮으로 좋다 하여, 칭찬함으로써 더 좋게 만들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것들은 받는 자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나 이것들을 보여 주는 자는 보여 줌으로써 더 나빠지거나 더 나아진다. 마땅히 사랑하고, 감탄하고, 경외해야 할 것을 그리하면 더 나아지고, 마땅치 않은 것을 그리하면 분명히 더 나빠진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주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당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행하면 우리가 당신을 크게 섬기는 것으로 여기시니.

뿌리, 풀, 기타 사물의 본성을 저울질하듯이, 평판, 호의, 칭찬, 비난의 본성도 그리 저울질하라.

각 개인의 사랑은 모든 이에게 속한다. 각 사람은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이 특별히 자기에게 보여지기를 바라는 자는 강도이며, 그로써 모든 이에 대하여 죄인이 된다.

보라, 이 몸과 섞인 채 그대는 충분히 비참하였으니—벼룩에 물리거나 종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부패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대는 마치 그것들이 몸인 양 다른 것들에—사람들의 평판, 감탄, 사랑, 명예, 두려움 및 이와 유사한 것들에—자신을 섞었고, 몸의 상해로 고통받듯이 이것들의 상해로도 고통에 시달린다. 그대가 불타는 장작을 그대 자신이 가져다 댄 것이다. 그대의 명예는 그대가 경멸받을 때 상처를 입는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이다. 몸의 형상들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라.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그대를 경멸한 바로 그 악덕으로, 그대도 경멸받은 것을 소심한 자로서 슬퍼하였으니—곧 교만이다. 그리고 그가 그대에게서 빼앗은 바로 그 악덕으로, 그대도 빼앗긴 것을 슬퍼하였으니—곧 소멸할 것에 대한 사랑이다.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도와줌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이든 경멸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들의 감정—곧 미움이나 사랑—을 경멸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좋은 평판이나 나쁜 평판도 경멸할 수 없을 것이다.

보라, 그대가 영혼의 사랑과 다른 감정들을 작은 동전에 파는 것을—마치 술집에서 포도주를 팔듯이. 또한, 그대가 인간 영혼들의 평판, 사랑, 기타 감정이나 동요를 작은 동전에 사는 것을 주시하라—마치 술집에서 포도주를 사듯이.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칭찬을 위하여 주었고, 저 사람은 배와 목구멍의 쾌락을 위하여 주었다. 이 둘 중 누가 더 나쁘게 행하였는가? 이것은 나도 모르나, 한 사람은 돼지와 같은 쾌락에 의하여, 다른 한 사람은 악마적 쾌락에 의하여 움직였음은 안다.

그대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은가? 물론이다, 그들이 나를—곧 이 나의 삶을—도와주도록.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이 약하고 그들의 폭력에 굴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원하면 나는 죽을 것이요, 원하면 살 것이라고. 이는 거짓이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대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하여 그대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대는 사람들이 그대에 대하여 위대하거나 좋은 것을 생각하여, 그대를 사랑하거나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랑하거나 두려워하여 도와주거나, 적어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반대로, 사람들이 그대에 대하여 비천하거나 악한 것을 생각하여, 그대를 미워하거나 경멸하거나, 해치거나, 적어도 도와주지 않을까 두려워하거나 혐오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물러나고, 불안정하고 약한 것들에 집착하고 의지함으로써 그대가 얻은 약함 때문이다. 그것들의 비천함과 약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들을 위하여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들을 위하여 두려워하고 슬퍼한다—곧 그것들이 소멸하거나 빼앗길 때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것들의 비천함과 약함을 인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들에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그대는 어떠한 변명도 전혀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의 약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것에 의지하고, 그 비천함을 알면서도 여전히 사랑하거나 감탄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때, 그대 안에 공존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가지가 존재함을 그대는 보여 주는 것이니—곧, 그것들의 약함과 비천함을 알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그대 안에 없었다면—곧, 사랑하지 않거나 그것들의 비천함을 알지 못하였다면—그것들이 소멸할 때 결코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7장. 의인의 참된 칭찬과 악인의 비난, 그리고 누가 칭찬받을 자격이 있고 없는가에 관하여.

칭찬받을 만한 자가 되라. 선한 자가 아니면 올바르게 칭찬받지 못하며, 칭찬을 갈망하는 자는 선하지 않으니, 따라서 칭찬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칭찬하는 자에게 기분 좋게 대할 때, 그대는 자신의 칭찬자에게 기분 좋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허영에 찬 그대가 더 이상 칭찬받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의로운가"라고 말할 때—그러한 자가 칭찬받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그대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대는 적지 않게 비난받는 것이니, 그토록 악하고 그토록 불의하기 때문이다. 의인에 대한 칭찬은 불의한 자에 대한 비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로서의 그대에 대한 비난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의인의 칭찬자에게 박수를 보낼 때, 그대 자신의 가장 참된 비난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니, 그대가 불의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는 의롭지 않으니—하루 된 어린아이조차도 그러하지 않다.

칭찬을 기뻐하는 자는 칭찬을 잃는다. 그대가 칭찬을 사랑한다면, 칭찬받고자 구하지 말라—곧, 칭찬받기를 원한다면, 칭찬받기를 원하지 말라. 칭찬받기를 원하는 자는 참되게 칭찬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행이 공표되는 자가 칭찬받는 것이다. 그러나 칭찬받기를 원하는 자는 모든 선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크고 악마적인 악—곧 큰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칭찬받지 못한다. 반대로 의인은 항상 칭찬받으며, 그에 대한 비난은 있을 수 없다. 비난이란 악에 대한 불인(不認)이기 때문이다. 의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에게 던져질 수 없으므로, 비난받을 수 없다. 보편적으로, 의인에 대한 모든 칭찬은 불의한 자에 대한 비난이며, 불의한 자에 대한 모든 비난은 의인에 대한 참된 칭찬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떤 선으로 칭찬받을 때, 그것은 칭찬받는 자가 아니라 칭찬하는 자에게 유익하다.

누군가가 그대의 거룩함 때문에 그대를 칭찬한다—그는 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대 너머에 있는 것, 곧 거룩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거룩함을 기뻐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다면, 그대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현세적인 것을 잃고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자는, 바로 그 사실로 자기가 잃을 자격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모욕을 받고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자는, 자기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모욕받기 싫은 만큼이나 칭찬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경멸당하거나 하찮게 여겨진 것에 슬퍼하였다. 바로 이 사실로 그대는 경멸당하고 하찮게 여겨질 자격이 있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정당하게 행하여진 것임을 보여 준다. 경멸당하고 하찮게 여겨질 자격이 없었다면, 경멸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하나만으로, 혹은 주로 이것에 의하여, 그대는 경멸당하고 하찮게 여겨질 자격이 있다—곧,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무가치하고 경멸받을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무가치하게 여겨지거나 경멸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8장. 사랑받고 감탄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 관하여, 그리고 그러한 욕망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악마와 같아지며, 자기 자신을 타인의 우상으로 만드는가에 관하여.

하느님을 참으로 경배하는 자는 오직 경외, 사랑, 존경, 공경, 감탄의 정으로 참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향하는 자뿐이다. 이것만이 참되고 완전한 경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외의 어떤 것에 이를 바치는 자는 참된 우상 숭배자이다. 이것이 자기에게 바쳐지기를 원하는 자는—온갖 수단으로 사람들에게서 이를 강탈하려 애쓰는 악마가 아니라면—참으로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리하여 사람들의 모든 불만은 이것으로 귀결된다: 그들의 신들이—곧 그들이 이 참되고 신적인 경배를 바쳐 온 피조물들이—소멸하거나 빼앗기거나, 혹은 그러한 경배가 자기들에게 바쳐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 안에, 그리고 온 세상에 아직도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가 군림하고 있는지 보라.

어떤 것도, 사랑받는 바로 그 사실로써 사랑하는 자를 복되게 하지 않는 한, 선으로서 사랑받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곧, 다른 이에게 사랑받거나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이를 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장 잔인한 것은, 자기에게 주의와 애정과 희망을 고정시키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은 그에게 유익을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봉사 대신 자기의 봉사에 사람들이 몰두하기를 원하는 악마들이 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사랑자들에게 외쳐라: 이제 그만두라, 불쌍한 자들이여, 나를 감탄하고, 공경하고, 어떤 식으로든 존경하는 것을—나는 비참한 자로서 나 자신에게도 너희에게도 아무 도움도 가져올 수 없으니—아니, 오히려 내가 너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대가 할 수 있는 한, 그대는 모든 사람을 파멸시킨 것이다. 그대는 하느님과 그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끼워 넣어, 그들이 시선을 그대에게로 돌리고 하느님을 버리고서, 오직 그대만을 감탄하고 바라보고 칭찬하게 하였으니—이것은 그대에게도 그들에게도 전혀 무익하며, 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적 피조물 가운데, 특히 경건한 마음들 가운데 이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으며, 몸의 부패보다 더 비천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사람들의 감탄의 대상이 되고자 할 때, 바로 이 교만에 의하여 눈이 멀어, 얼마나 가련한 깊이로 떨어졌는지 보라. 그러므로 하느님의 정의를 보라. 그대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으로—곧 피조물의 가장 탁월한 부분에 의하여 감탄받을 존재로—세웠고, 하느님께서는 그대를 가장 낮은 것에 종속시키셨다. 그대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보이고, 칭찬받고, 감탄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사랑받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존경받기를 원하였고, 할 수 있는 한 그리하였으니—이 모든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부분인 이성적 정신들만이,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대신 피조물의 가장 존귀한 부분에 자기 자신을 내세운 그대가, 피조물 가운데 가장 비천한 것을 자기의 하느님으로 받고, 가장 탁월한 것에게서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 할 것을 왜곡된 찬탈로 강탈하고자 한 그대가, 자기 자신이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 할 것을 가장 비천한 것—곧 몸의 부패한 시체—에 쏟게 된 것은 정당하게 행하여진 것이다. 위에 열거된,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 할 모든 것—사랑 등—을 그대는 이것들에 온 마음으로 바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것—칭찬받는 것 등—을 찬탈하는 동안, 그대는 인간의 것—하느님을 찬양하는 것, 그대가 그것을 위하여 창조된 것 등—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가장 높은 것 위에 자리가 없고, 가장 낮은 것 아래에도 자리가 없으므로, 그대가 가장 높은 것 위로 도달하려 하는 동안, 다시 가장 낮은 것 아래에 있게 된다. 어떤 것에 의하여 한계지어지는 자는 사랑을 통하여 그것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는 가장 낮은 것들을 향유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가장 낮은 것 아래—아무 자리도 없는 곳—로 밀려난 것이다.

복된 야고보가 말하듯이, 이 세상의 우정은 하느님에 대한 적대이다. 이 세상의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원수로 만든다(야고 4:4). 그런데 이 세상에서 파리 한 마리라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온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그가 사랑하는 것에 온 세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는 한,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적대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가 그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할 때, 그들이 하느님의 원수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창조된 것은 무엇이든 경멸하여 하느님께 화해되도록 설교한다. 그렇다면 그대 혼자만 예외로 하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인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하여 경멸하라고—그리하여 인류와 하느님의 화해를 방해하는 유일한 것이 그대가 되고, 오직 그대 때문에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적대가 지속되고,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게 될 것인가—그들이 그대를 사랑함으로써 온 세상을 자기에게 필요한 것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기에? 세상 안에서 혹은 세상을 위하여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하느님 안에서 혹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요, 욕망으로 사랑하는 것과 자비로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제9장. 현세적인 것들의 향유와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떠나고, 악마들에게 유린당하는 영혼에 관하여.

현세적 재화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자: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의 부패의 병을 고쳐 주신다면, 그대는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를 사용하는 바로 그 일에서, 우리로 인하여 그대가 어떤 면에서 나아지는지, 혹은 이로부터 장래에 무엇을 희망하는지 생각하라. 그대는 우리를 경험하였다. 그런데 어찌하겠는가? 그대가 우리로 변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대로 변하기를 원하는가? 그대에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왜 우리의 소멸에 슬퍼하는가? 우리는 그대의 욕망에 따라 남아 있기보다는 주님의 뜻에 따라 소멸하기를 선택하였다. 그대의 이 사랑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런 감사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어리석은 자로 비웃는다. 우리가 주로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겠는가—하느님께인가, 그대에게인가? 감히 말하여 보라, 그대의 거의 전체 할 일이—우리를 삼키고 썩은 것으로 바꾸는 것이—아닌가?

이것이 그대의 유용성, 그대의 능력이다: 그대를 통하여 우리의 부패가 넘치도록 흐르는 것이니, 그대는 이 자신의 일을 지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대의 지복이다: 우리의 오물이 없지 않은 것, 그대가 자발적으로 그것에 굴복하는 것, 악마가 그것을 통하여 그대를 더럽히고 유린하는 것—그대의 기만과 파멸에 대한 자신의 큰 쾌락과 기쁨 없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향유하는 어떤 형상이든, 그것은 그대의 마음에 대하여 남편과 같다. 마음이 그것에 굴복하고 복종하기 때문이다. 형상이 그대에게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형상에 순응하고 그것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형상의 모습이 신전 안의 우상처럼 각인되어 남아 있으니, 그대가 그것을 향유할 때 그대는 소나 염소가 아니라, 이성적 영혼과 몸—곧 그대의 전체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보라, 마치 술집에서처럼, 그대는 자기의 사랑을 매물로 내놓듯 창기처럼 내놓았고, 그들의 선물에 비례하여 사람들에게 그것을 분배한다. 이 술집에서, 아무것도 주지 않거나 줄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것도 주지 않았을 때 위에서 무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대는 팔 것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기의 보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자기를 비우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욕망에 대한 준비를 만든다.

그대를 그대 자체 안에서 향유하고자 하는 자는, 그대의 피를 빠는 파리와 벼룩이 그대에게서 받을 자격이 있는 것과 같은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만일 이것들이—(그대의 마음에 각인되어, 오직 하느님께만 돌려야 할 경배인 감탄과 사랑으로 그대가 굴복하는) 그것들이—그대의 집 어느 구석에서 조각되거나 그려진 채로, 감탄이나 사랑이나 몸의 절로 숭배되었고 백성이 이를 알게 되었다면, 그들이 그대에게 무엇을 하겠는가?

간음의 상대가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는 이유만으로 간음을 삼가고 자기 남편을 떠나지 않는 여인은, 간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간음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악을 쌓기 위하여,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마음의 다리를 벌려 놓아, 오래 지속되거나 영원한 간음을 가질 수 없기에 잠시나마의 간음을 향유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요약하자면 인간 타락의 전부이다: 자기보다 나은 것, 곧 하느님을 버리고, 자기보다 못한 것에 몰두하여, 향유하며 그것에 집착하는 것, 곧 현세적인 것들이다.

쇠똥구리는 모든 것 위를 날며, 모든 것을 내려다보되, 아름다운 것이나 건전한 것이나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악취 나는 분뇨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그 위에 내려앉으며, 그토록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경멸한다. 이와 같이 그대의 영혼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의 크고 귀한 것들을 시선으로 날아다니되,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경멸하며, 마음에 떠오르는 많은 비천하고 더러운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이러한 것들 앞에 부끄러워하라.


제10장. 간음하는 영혼의 뻔뻔함과 철면피에 관하여, 하느님께 자기의 사악함 안에서 위로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영혼에 관하여.

그대가 탐욕스럽게 집착한 무언가를 빼앗지 말아 달라고 하느님께 구할 때, 이는 마치 한 여인이 남편에게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혀, 자기 범죄의 용서를 구해야 할 때에, 오히려 간음 자체의 쾌락을 중단시키지 말아 달라고 구하는 것과 같다.

그대에게는 하느님에게서 멀리 간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그분까지도 이쪽으로 구부려, 그 향유에 의하여 그대가 타락하게 되는 것들—곧 몸의 형상, 맛, 색깔—을 증가시키고, 보존하고, 배열하여 주시도록 한다.

어떤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이토록 뻔뻔하게 말하겠는가: 나에게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 함께 자게 해 주시오, 그가 당신보다 더 마음에 들기에—그렇지 않으면 나는 쉬지 못하겠소? 그런데 그대는 그대의 남편—곧 주님—에게 이를 행하니, 그분 외의 무언가를 사랑하면서 바로 그것을 그분께 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느님께 "이것 혹은 저것을 주소서"라고 말할 때—이것은 곧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짓고, 당신에게서 멀리 간음할 무언가를 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분에게서 그분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구할 때, 그대는 바로 그 청원으로 그분 앞에 자기의 죄과와 그분에게서의 간음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신랑이 자기 신부를 간음의 현장에서 잡고서, 간음에 쓰이던 것들만을 빼앗는다면, 이는 자비로운 징벌이다. 그런데 신부가 이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뻔뻔하고 철면피인가! 그대에게 슬퍼할 거의 유일한 원인은 바로 이러한 종류—곧, 빼앗긴 간음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슬픔 자체가 그대의 간음을 입증하니, 다른 증인이 필요하지 않다.

가장 뻔뻔하고 철면피인 여인이라도, 대개 신랑의 눈으로부터 숨기는 것이 있다—정부(情夫)에게 닥친 손실 때문에, 그리고 분노한 정부로부터 받은 모욕 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또한 그 모욕 자체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기쁨을.

이제 그대가 하느님께 대하여 적어도 이만큼은 하는지 보라—그대가 자기 간음의, 곧 이 세상의 손실을 위하여 그분 앞에서 공공연하게 슬퍼하고, 그 번영에 기뻐하지는 않는지. "그러므로 너는 창녀의 이마를 지녔다"(예레 3:3).


제11장.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사랑으로 자기 자신 밖으로 쏟아져 나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없게 하는, 자기 무지에 관하여.

내적 볼거리의—곧 하느님의—빈곤이(하느님께서 내면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면이 눈먼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대로 하여금 기꺼이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나가게 하고, 아니 차라리 마치 어둠 속에 있듯이 자기 안에 머물 수 없게 하며, 몸의 외적 형상들이나 사람들의 평판에 감탄하며 몰두하게 한다. 그대를 붙잡아 두거나 두렵게 하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는 것이 몸의 형상들이라고 탓하지 말라—그대 자신의 눈멂과, 지극한 선으로부터의 공허함을 탓하라.

그대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알지 못하는지 보라. 그대에게 이토록 먼 곳이며 알려지지 않은 곳은 없으니, 거짓을 말하는 자의 말을 더 쉽게 믿을 곳이.

때때로 악은 선의 보상 없이도 불쾌하게 한다—예를 들어, 한 집에 있는 두 사람이 둘 다 자기 뜻을 교만하게 행사하고자 한다면, 둘 다 악을 원하는 것이다. 서로의 뜻이 불쾌하면, 이는 교만에 대한 미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교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자기의 교만을 사랑하는 이 사람이, 자기를 방해하는 저 사람의 교만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은밀한 올가미이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마치 몸의 형상들을 바라보고 감탄하러 이곳에 온 것처럼 처신한다.

내적 볼거리가 결핍되지 않았다면, 그대는 결코 외적 볼거리로 나가거나 거기에 몰두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화에서 소녀가 태양을 응시하다 시들어 갔듯이, 그대도 반드시 소멸해야 할 몸의 형상들과 인간의 평판에 대하여 그러하다.

이 볼거리—곧 그대의 영혼이 몸과 그 형상, 인간의 평판과 호의 위로 얼마나 올라서거나 그 아래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는 이 삶에서 하느님의 눈 외에는 무엇보다도, 그리고 그대의 능력에 따라 그대 자신의 눈 외에는 아무에게도 열려 있지 않다.

보라,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린 채, 그대는 그분을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하여 입을 벌린 채 이 세상에 들어왔다.


제12장. 인간의 참된 유익에 관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의 유익이 어떻게 하나이며 동일한가에 관하여.

안전하게 수고하기를 택하는 자는 복되다. 이것이 안전한 선택이요 유익한 수고이다: 모든 이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되, 그들이 그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그런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이익에 전념하는 것처럼 보일수록, 실로 유익한 것을 그만큼 덜 행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고유한 유익이란 모든 이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자는 자기의 유익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영혼에 큰 해를 입는다. 존재할 수 없는 자기만의 것을 구하는 동안, 공동의 선—곧 하느님—에게서 밀려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본성을 가지듯이, 하나의 유익을 가진다.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 모든 이가 행복하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에게 유익하지 않거나 해로운 것을 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전 생애에서 단 한 번이라도 유익한 것을, 마땅히 원해야 할 방식으로 원하기를! 오 비참한 처지여—해로운 것을 거부할 수 없다니!

사람들에게 왜 비참한가 물으면—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기 때문인지—그들은 곧바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곧: 우리는 밝히 깨달았으며,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잘 알고 사랑하지만, 너무 약할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거짓이다. 세속적인 사람들 가운데 자기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가 누구인가?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비천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더 낫고 더 귀하고 더 존귀한 것이 어떻게 더 못하고 더 비천하고 덜 존귀한 것에 의하여 향상될 수 있겠는가? 아아,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는 얼마나 많고, 획득한 후에 자기에게 참으로 유익한 것을 원하는 자는 얼마나 적은가! 그러나 아담의 자녀들에게 이를 설득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악도 원하지 않으며, 그토록 많은 수고 가운데 견디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견딘다고 맹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자기의 유익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언제 믿어질 것인가? 이는 마치 우상 숭배자에게 그가 하느님을 경배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는 곧장 일어나 자기가 하느님을 경배한다고 맹세하며, 자기 경배에 얼마나 많은 비용을 쓰는지 열거하고, 심지어 손가락으로 자기가 경배하는 바로 그 신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류에 속아 다른 것을 하느님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의심 없이 자기의 참된 유익을 사랑하거나 원하지 않으며, 다만 자기의 오류 속에서 유익이라고 여기는 것을 사랑하거나 원한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거나 겪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행하거나 겪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외에는 아무도 자기의 참된 유익을 원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하느님만이 인간 본성의 전체이자 유일한 유익이기 때문이다. 기록되어 있으니: "사랑 안에 머무르는 자—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안에 머무르신다"(1요한 4:16). 그러므로 인간의 유익이란 이러하여, 그것을 가진 자 외에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는 자에게서 어떤 식으로도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기의 유익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이를 맹세할 준비가 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그것을 갖지 못한다는 바로 이 사실이, 그들이 다른 무엇을 사랑하지 자기의 참된 유익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갖기 위하여 행해야 할 것은 사랑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끊임없이 그것을 만들려고 한다—마치 이교도들이 하느님을 만들려 하듯이. 하느님만이 인류의 유익이시고, 그분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분 없이 있을 수 없다면, 이 유익은 영원하시기에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되어야 할 뿐이다. 오직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우리의 모든 비참의 원인이니: 우리가 우리의 유익을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거나, 혹은 알아야 하고 사랑해야 할 만큼, 혹은 알아야 하고 사랑해야 할 방식으로 알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제13장. 온갖 종류의 순경이나 역경에서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슬기로운 주의에 관하여.

보라, 그대는 슬퍼하고 동요하며,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하여—자기에게 모욕적이고 증오에 찬 말을 하였다고—불평한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러한 것이 자기에게 말하여졌다는 것에, 혹은 그러한 마음으로 말하여졌다는 것에 슬퍼하는 것이다. 좋고 좋다, 만일 그의 유익을 위하여 슬퍼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그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릇된 것이다. 그 어떤 거룩하고 선한 것도, 그토록 거룩하고 선하게 그대에게 말하여졌다 할지라도, 그대가 이 말들을 잘 사용하면 줄 유익보다 더 유익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든 나쁘든, 누가 그대에게 무엇을 말하거나 행하든, 잘 하거나 나쁘게 하든, 그대가 그것을 사용하는 대로 그대에게 될 것이다. 그러나 행하거나 말한 자에게는, 그가 그것을 행하거나 말한 의지에 따라 될 것이다. 불의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거짓을 말하지, 그대에게는 아니니(그대가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꾸짖는다면), 이와 같이, 불의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악은 자기 자신에게—곧 자기의 파멸에—행하여지는 것이니, 그대가 동의하지 않고 경건하고 동정 어린 마음으로 꾸짖는다면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악을 행하거나 말한 자를 위하여 슬퍼해야지, 그대 자신을 위하여가 아니다. 타인의 악도 그대가 그것을 잘 사용하면 그대의 선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며—그대가 잘 사용하는 만큼 큰 선으로. 그러므로 그대에게 행하여지거나 말하여진 것이 악이든 선이든, 그대가 나쁘게 사용하는 만큼 큰 악으로 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 8:28)—심지어 타인의 악까지도. 그러나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반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악을 이룬다—심지어 선한 것까지도. 그러므로 그대의 모든 불만을, 사물을 나쁘게 사용하는 그대 자신을 향하여 돌리라.

그대에게 행하여지거나 말하여진 것이 참으로 악이라 할지라도, 그대가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지 않는 한 그대에게 결코 악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선한 것도 그대가 잘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대에게 선이 되지 못할 것이다.

항상 주시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그대의 영혼 안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타인이 선이든 악이든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그대가 그들의 행위로 무엇을 하는가—곧 그대가 그들의 선과 악을 어떻게 사용하고,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유익을 얻는가, 격려하고 돕거나, 동정하고 교정함으로써. 그때에야 그대는 모든 사람의 행위를 잘 다루는 것이니, 그들의 은혜 중 아무것에 의해서도 편파에 끌리지 않고, 그들의 악행 중 아무것에 의해서도 사랑에서 물러나지 않을 때이다. 그때에야 그대는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평화를 이루지 않는 자들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덕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대의 영혼이 분노, 미움, 슬픔, 두려움의 동요에, 혹은 그것들의 원인에 빠지지 않는 한, 다가올 세대에 그대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두 개의 공을 햇빛의 광선 속에 놓아 보라, 하나는 진흙으로, 다른 하나는 밀랍으로 된 것을. 광선은 하나이고 동일하지만 둘 다에게 같은 효과를 낼 수 없으며, 각각의 성질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여 — 하나를 굳히고 다른 하나를 녹인다. 흙을 녹일 수도, 밀랍을 굳힐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단일한 종류의 금속 — 곧 금 — 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때, 그들의 마음의 기질에 따라 다른 움직임을 일으킨다. 하나는 그것을 빼앗으려 불타오르고, 다른 하나는 훔치려 하며, 또 다른 하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려 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소유자를 복되다 부르고, 지혜로운 자는 그 애호자를 슬퍼한다. 그것은 선한 마음에 악한 의지를, 악한 마음에 선한 의지를 일으킬 수 없으며, 오히려 이것들과 물체나 여타 사물의 모든 다른 외양이나 원인들은 그 마음들의 기질에 따라 인간의 정신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우리 악의 전체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돌려져야 하지, 우리가 죄를 짓는 그 사물들에 돌려져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우리를 시험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은밀히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낼 뿐,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들의 시선은 신부가 얼마나 굳건하고 흔들림 없이 사랑으로 신랑에게 매달리는지 시험한다. 그녀가 참으로 정결하다면, 다른 어떤 이의 아름다움에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도 마찬가지로, 가장 굳건한 애정으로 하느님께 매달렸다면, 어떤 피조물의 광경에도 유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대의 정결이 얼마나 큰지를 시험하기 때문이다.


제14장. 이 세상의 역경에 관하여, 그것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이는 역경을 통해 우리가 유익하게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도록 강요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피조물에 대한 욕망을 통해 그분 밖으로 손을 뻗칠 때마다 어떻게 찌르시는지 보라 — 마치 유모가 추위에 죽지 않도록 요람 밖으로 내민 아이의 팔을 찌르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그대의 마음의 발이 쉴 곳을 찾지 못하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적어도 강요되어서라도, 오 영혼아, 노아의 비둘기처럼 방주로 돌아오게 되기를.

빈곤 자체, 혹은 고난은 현세의 형리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선한 것들, 곧 이것들과 다른 것들을 갈망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현세적인 것들에만 익숙하고 다른 것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가 겪는 것과 매우 다른 것들을 갈망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분노 — 곧 고난 — 를 일종의 화해를 통해 잠깐이나마 어떤 완화로 중단시키기를 원하거나, 또는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을 겪기로 택한다.

오, 고통을 겪는 사람이여, 그것을 달래고 싶은가? 그렇다. 일시적으로인가 영원히인가? 영원히이다. 그러면 영원한 치료제, 곧 하느님을 갈망하라. 그분이 그대를 치신 것은 그대가 그분을 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지 — 약초나 붕대를 갈망하도록 함이 아니다.

단 하나의 열병이 그대가 싸우는 모든 것 — 곧 다섯 감각의 쾌락 — 을 빼앗아 간다. 그러면 부여된 승리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오히려 자유를 미워하며 굴복할 대상을 찾는다.

그대가 기꺼이 원수의 올무와 화살에 기대며, 그것들을 경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껴안고, 그대 자신을 그것들에 노출시키며,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도피한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대는 그것들을 치료제로, 위안으로 여기며, 그것들을 갈망하고 그것들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번영은 올무이다. 이 올무를 끊는 칼은 역경이다. 번영은 하느님 사랑의 감옥이다. 이 감옥을 부수는 공성 망치는 역경이다.

역경이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는 내가 떠나도록 애쓴다. 이것은 분명히 그대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대가 올바르게 원한다면 할 수 있다.

주님께서 곡조를 지휘하시는 동안 나는 머무를 수 없으니, 나는 한 음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장 악한 자들에게 어린양처럼 되어야 한다면, 어떤 채찍으로 교정받을 때 하느님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그래야 하겠는가?

보라, 그대는 마치 전쟁 중에 있는 것 같다. 갈증이 태우면 음료를 맞세우고, 배고픔이 괴롭히면 음식을 맞세우며, 추위에는 옷이나 불을, 질병에는 약을 맞세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인내와 세상에 대한 경멸이 필요하니, 이로부터 일어나는 또 다른 전쟁 — 곧 악덕의 무리 — 에 정복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대가 오직 쾌락에만 사로잡히는 이상, 오직 쾌락적인 것들만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역경 속에서가 아니면 결코 안전하지 않다.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하느님께서 그대를 위한 채찍을 만드셨다. 그대는 번영을 피하고 역경으로 돌진하며 괴로워한다. 그분 — 곧 채찍을 파괴하시는 분 — 을 제외한 모든 것이 채찍이니, 마치 아들이 때리는 아버지의 회초리를 부러뜨리는 것과 같다.

더 강한 힘에 제압된 몸은 밀리거나 끌리며, 의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몸을 제압하여 움직이는 것을 돌보지 말고, 정신과 의지를 움직이는 것을 돌보라.

현세적인 것을 잃은 자들에게 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내를 잃은 자들에게 화가 있다. 어떤 정념도 인내 자체를 통하지 않고는 극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굶주림은 먹음으로써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봉사받는 것이며, 갈증이 마심으로 봉사받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정념들은 영혼이 외적인 물체의 형상들을 향유하도록 기울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것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군림하게 되니, 그 목적 — 곧 영혼의 기울어짐과 더 쉽고 더 큰 기울어짐을 위한 준비 — 을 달성한 것이다.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손상된 것들에 대한 경멸과 정신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다.

그대가 육체적 쾌락을 많이, 또 격렬하게 물리칠수록, 악마의 그 많고 강력한 올무들을 그만큼 피하게 된다. 그대가 환난을, 특히 진리를 위한 환난을 많이 피할수록, 그만큼 많은 치유의 약을 경시하는 것이다.


제15장. 참된 인내에 관하여, 그것으로써 죄인과 약한 자를 견디고 사랑해야 하며, 그들의 교정을 경건하게 희망해야 한다.

아직 줄기에 있는 곡식 — 아직 숙여진 밀 — 을 희망 속에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보라. 아직 선하지 않은 자들을 그와 같이 사랑하라. 진리이신 분이 그대를 대하셨듯이 모든 사람을 대하라. 그분이 그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견디고 사랑하셨듯이, 그대도 다른 이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견디고 사랑하라.

그대는 병자를 절망함으로써 의사를 모독하는 것이다. 그의 치유는 의사의 치유 능력과 자비만큼이나 용이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작품 때문에 하느님의 작품을 경멸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사람의 작품은 살인, 간음,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들이지만, 하느님의 작품은 사람 자신이다. 집이나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재료 — 곧 나무나 돌 — 도 사랑한다. 그러므로 선한 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악한 자도 사랑해야 하니, 선한 자는 결코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잔을 만들 수 있는 것을 사랑하면서, 어찌하여 천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가? 사람들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천사와 동등하게 될 것이다" (루가 20:36).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기술이니, 반대되는 것들은 반대되는 것들로 극복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원수의 화살을 무디게 하는 과녁으로 놓였으니 — 곧 선의 대립으로 악을 파괴하기 위함이다. 그대는 결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니, 혹 치료적으로 하는 경우라면 이는 더 이상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해 선을 갚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얻거나 누리기 위한 기술을 수고롭게 배우는데, 그대는 하느님을 얻고자 하면서도 그분을 얻는 기술 — 곧 악에 대해 선으로 갚는 것 — 을 경시한다.

이곳을 떠나든지, 아니면 그대가 이곳에 놓인 목적을 수행하라 — 곧 치유하고 견디는 것이다.

이 사람은 어리석다 — 곧 적대적인 사람이다. 저 자는 교활하니 — 곧 이 사람을 통해 그대를 공격하는 악마이다. 이 사람에게는 자유케 하기 위해 부드럽게 대하라. 저 자에 대해서는 조심하라.

그대는 내가 동요했기 때문에 동요하며, 동요한 채 동요한 자를 꾸짖는다. 오 부끄러운 일이여! 바른 자가 다리 휜 자를 비웃으며, 흰 자가 검은 자를 비웃는다. 나로서는 교정받겠으며, 더 이상 이 악을 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치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가져올 수도 없는 이 그대의 악덕에 대해 어찌하겠는가?

그대는 어찌하여 저 형제를 내보내고자 하는가? 그가 분노와 온갖 악덕으로 가득하기 때문인가? 그러면 하느님도 그대에게 그와 같이 하시기를. 그대의 입에서 그를 내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건강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 필요하다" (마태 9:12). 어머니에게 아들을 왜 버리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약하고 병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자기 아들도 자기에게 그리하기를 원하는지 물어보라. 그가 아니라고 할 때 이렇게 덧붙이라: 그러면 당신은 나쁜 이유로 미워하는 것이오. 의사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용서를 구하는 자가 복수를 요구하는 자가 되지 말라.

그대가 그토록 불결한 자신을 참는다면, 어찌 다른 누구도 참지 못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게 하라. 그대는 인내나 겸손까지만 가라. 이것이 그대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고, 저것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많이, 어떤 방식으로 범하더라도 하느님과 사람들이 그대를 향해 가지기를 바라는 그 심정을 —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어떤 방식으로 범하더라도 — 그들에게 보여라.


제16장. 약한 자를 향한 자비로운 보살핌과 치유에 관하여, 그리고 부패되지 않은 마음으로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들에게 상처받은 어머니는 복수로 아들의 상처를 구하지 않으니, 아들의 상처를 자기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려 아들을 해친다면, 그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되풀이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이와 같아야 하니, 자비를 베풀기를 갈망하며, 자기 슬픔의 가장 확실한 원인 — 곧 소멸할 것들 — 을 아는 것이다.

그대의 형제와 그의 악덕을 구별하는 것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만큼이나 쉽다. 사람을 보면 누가 분노하고 누가 분개하겠는가? 그러나 그의 악덕을 보면 누가 마음 상하지 않겠는가? — 매우 지혜롭고 선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으니, 그는 이것이 다른 누구보다 그 사람 자신에게 더 해가 되며, 따라서 그에게 동정을 보여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대의 형제는 사랑과 지혜로 가득한데 그대는 그것을 나누지 못하며, 그는 분노와 증오와 격노로 가득한데 그대는 그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미친 자에게는 제정신인 자가 필요하니, 그를 제지하거나 치유하기 위함이다.

그대 자신이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보여주시기를 유일하게 갈망하는 것 — 곧 자비 — 을 채찍으로든 부드러움으로든 모든 사람에게 보여라. 어찌 눈먼 자와 약한 자를 모욕하는가? 그대도 같은 처지이며, 그대가 무엇이 다르다 하더라도 그대 자신으로부터 혹은 그대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항상 이와 같이 광기에 이끌린다면 그대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동요해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한 사람이 때때로 동요할 때 어찌 그대가 동요하는가? 그대는 그에게 약을 빚지고 있지, 동요를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광기를 미쳐 날뜀으로 어떻게 치료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그대의 동류의 괴로움이 그대를 기쁘게 하는가?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인가? 그러면 그대의 괴로움도 정의롭기에 하느님을 기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그대를 영원한 불에 넘긴다.

어리석은 의사는 자기 명성을 떨어뜨리기 싫어하여, 자기 잘못임에도 잘못되는 것은 모두 병자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대도 그대의 관할 아래 있는 자들에게 그렇게 한다.

만일 그대가 모든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그들의 죄와 비참을 생각한다면 그들 모두를 향해 어떤 심정을 가질 것인지 — 적어도 지금, 그대의 눈으로 그들이 눈멀음이든 약함이든 멸망하는 것을 볼 때 바로 그 심정을 가지라. 그들은 악마에게 현세적인 것들을 통해 속거나 정복당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그대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심판 앞에 떨라. 그대가 다른 이들 위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들이 왜 그대의 위에 있지 않았는지 그대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대의 위에 있었다면 그대를 향해 어떠했어야 할지를 그대가 보는 대로, 그들을 향해 그와 같이 되라.

그대의 보상은 관할 아래 있는 자들의 진보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진보하든 하지 않든 그대의 갈망과 노력에 따라 측정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악한 자임을 충분히 확인했을 때, 그의 죄를 슬퍼해야 할 것이니, 주님도 그대의 죄를 슬퍼하셨기 때문이다. 병을 알고 나서 슬퍼하고 치유하기는커녕 조롱하기까지 한다면, 어찌하여 병자의 병을 조사하는가?

다른 이들의 악을 보거나 들을 때, 그대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그 안에 사람들에 대한 참된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다.

그대가 우연히 다른 이들보다 낫게 되었다 하여 기뻐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이 선의 몫이 적은 것을 슬퍼하고 이를 그대 자신의 부족함으로 여겨야 한다.

그대가 판단하거나 교정하고자 하는 자의 처지를 먼저 입어 보라, 그리하여 그대가 그의 자리에 있다면 유익하리라 느끼는 대로 그에게 행하라. "너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너희도 되질을 받을 것이며,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다" (마태 7:2). 그리스도도 판단하시기 전에 먼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대의 주인들 — 곧 그들의 아버지이신 주 그대의 하느님에 의해 그대에게 그들의 봉사가 맡겨진 자들 — 이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애써서는 안 되며,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대는 그들의 유익을 위해 그대 자신을 굽혀야 하지, 그들을 그대의 뜻에 굽혀서는 안 되니, 그들은 그대가 그들을 지배하도록 맡겨진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하도록 맡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 마치 병자가 의사에게 맡겨지는 것이 의사가 병자를 지배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치유하기 위함인 것과 같다. 의사는 병자에게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병자를 위하는 것 — 곧 병에 대적하는 것 — 이며, 환자에게서 겪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하고 충분한 보상을 환자의 건강에서 찾는다. 그는 아무것도 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병 자체의 탓으로 돌리며, 따라서 그의 완전한 복수는 병의 소멸이다.

네 사람이 두 의사에게 맡겨졌다. 건강한 사람 하나와 병든 사람 하나가 각각에게. 건강을 보전하거나 회복시키는 돌봄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었다. 한 의사는 맡겨진 자들의 건강을 보전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모든 것을 다 하였으나, 둘 다 죽었다. 다른 의사는 해야 할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 건강한 자는 건강하게 남았고 병든 자는 회복되었다. 이 둘 중 누가 보상받을 자격이 있는가 — 맡은 자들이 둘 다 죽은 자인가, 아니면 맡은 자들이 살아 있고 건강한 자인가? 의심의 여지 없이, 경건한 뜻으로 해야 할 일을 한 자는 그들이 살아 건강한 것만큼이나 칭찬과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기를 거부한 자는 그들이 죽은 것만큼이나 벌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의사를 완성하는 것은 두 가지이니, 곧 선한 의지와 완전한 지식이다. 그가 돌보는 모든 이를 치유하는 것은 그의 능력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회복의 희망 없이 앓고 있으며 누가 회복의 희망을 가지고 앓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돌봄을 기울여야 하고, 모든 자비로움으로 온전한 기술을 각 사람에게 시행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만인의 아버지 앞에서 죽은 자에 대해서도 건강한 자에 대해서 못지않은 은총과 보상을 받을 것이다.

마음을 부패시키지 않고 악한 자들 가운데 거하도록 스스로를 준비하라 — 이것이 천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인들과 함께 이것을 행하는 데 무슨 영광이 있겠는가?

악덕 있는 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악덕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천사의 덕이다. 병자와 미친 자 가운데 거하면서 전혀 오염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최고의 의사의 표지이다.


제17장.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힘과 효과에 관하여, 그리고 사랑은 어떻게 갈망하고 베풀어야 하는가.

어떤 물체의 형상을 향유하는 자는 그것으로부터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그 형상 자체에 돌리며, 이 때문에 마음으로 그것을 칭찬하고 사랑한다. 그는 자기를 선하다고 여기지 않고 그 형상을 선하다고 여기며, 오직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선하다고 여긴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향하여 뻗어 나가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 그것을 향유하며 감탄하고 사랑할수록 더욱더 큰 정신의 노력과 의지의 움직임으로. 그러므로 누군가 그 형상을 해하거나 빼앗으면, 그는 자기에게가 아니라 그 형상에 모욕이 가해진 것으로 여긴다.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 그의 천국이요 행복이었으므로, 그것에서 분리되는 것이 그의 지옥이요 비참이다. 그대도 하느님을 향하여 이와 같이 되라.

다른 선을 필요로 하는 선이 욕구될 때, 비참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궁핍이 쌓이고 늘어난다. 그러므로 다른 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을 갈망하라. 그런데 모든 것은 선함에 의해 선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선하기 위해 선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선함 자체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니, 그 자체로 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사랑하라, 그러면 복될 것이다.

그 마지막 흔적의 흔적 — 곧 현세적인 것들 — 이 그토록 많은, 그토록 큰 수고와 오류의 위험 속에서 그토록 많은 이성적이고 비이성적인 존재들에 의해 추구되는 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라.

그대 자신 안에서든 다른 이 안에서든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아무것에도 기뻐해서는 안 된다.

모든 악덕과 죄는 피조물 — 곧 가장 낮은 선 — 을 위해 저질러지기에, 창조주의 선 — 곧 최고의 선 — 에 대적한다.

우리 동류의 바람 — 곧 의견이나 칭찬 — 이 그토록 열심히 추구된다면, 우리 동류의 구원 — 곧 창조주 — 은 얼마나 더 추구되어야 하겠는가! 선하다고 불리는 것이 선하기를 원하지 않는 악인들조차 이에 기뻐할 만큼 달콤하다면, 선한 것이 됨은 얼마나 더 달콤하겠는가! 그리고 악하다고 불리는 것이 "악을 행하고서 기뻐하며 가장 나쁜 일들에서 즐거워하는" (잠언 2:14) 자들조차 참을 수 없을 만큼 쓰디쓰고 부끄러운 것이라면, 악한 것이 됨은 얼마나 더 나쁘겠는가!

사람은 창조된 어떤 것을 갈망하거나 육체적 감각으로 그것에 매달리며 자기 자신을 잊는다 — 그러나 그대는 언제 창조주를 향하여 이와 같이 행하는가?

주님은 그대에게 행복을 — 곧 그분 자신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그것으로부터 두려워하지도 동요하지도 않는 것 — 곧 평화와 안전을 — 가지라고 명하신다.

오직 진리만이 악에서 돌아서는 법을 알며, 오직 진리에 대한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악에서 돌아서는 것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사랑함으로써 결코 잃을 수 없는 것을 사랑하라 — 곧 하느님을.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이 그대의 전적이고 유일한 선이라면, 그분에게서 분리되는 것은 그대의 전적이고 유일한 악이며,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그대의 게헨나이고, 이것이 그대의 지옥이다.

이제부터 이 육체의 형상들로부터 젖을 떼라. 그것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라. 그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언젠가는 그것들을 잃게 되리니, 언젠가 큰 고통 없이는 하지 않을 일을 지금 기꺼이 큰 보상이나 은총과 함께 하라. 아무도 그것들을 빼앗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삶과 이에 속한 모든 것을 경멸하지 않겠는가? 보라, 모든 것을 가지라. 언젠가 이 모든 것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하게 될 일을 지금 하라 — 곧 이것들 없이 사는 법을 배우고, 주님 안에서 살고 기뻐하는 법을 배우라.

이웃에 대한 무상의 사랑에 관하여.

모든 이를 사랑하는 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구원받을 것이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자는 그것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대에 대한 미움이 모든 이에게 생명의 장애물이듯, 모든 이의 미움이 그대에게 장애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이 그대에게 유익하며, 그들이 그대를 사랑하는 것도 그들에게 유익하다.

사랑은 무상으로 — 곧 그 고유한 달콤함을 위해, 가장 달콤한 꿀처럼 — 갈망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미쳐 날뛴다 하더라도, 어떤 대가로도 팔아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사랑은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를 복되게 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사랑받기 위해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이라기보다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니, 사랑을 사랑으로 갚는 것이다. 그대는 환전상이며, 이미 그대의 보상을 받은 것이다.

그대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는 더욱 다정하고 친밀하게 보여라. 그대가 해를 끼친 자에게는 겸손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라.

사람들이 그대에게 행하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고, 모든 감사가 그분께 돌려져야 한다고 믿듯이, 그대가 사람들에게 보이는 선한 것도 무엇이든 그대의 공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 여기라.

누군가를 친구로 사랑하면서 그에게 부를 선한 것으로 바란다면, 그대는 그 사람 자신보다 부를 더 탁월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궁핍한 자로 사랑하면서 부는 충족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니, 부 없이 지내기보다 그 사람 없이 지내기를 더 기꺼이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불의 가운데 악인을 죽이는 자가, 불의를 미워하고 그것을 파괴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리한다면, 기만당한 것이다. 악인이 자기 불의 가운데 죽으면 불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의를 미워하는 자는 악인이 교정되도록 힘써야 하니, 그리하면 그의 불의가 소멸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요한 4:8). 그러므로 사랑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는 하느님을 파는 것이며, 자기 행복을 파는 것이다. 사랑할 때가 아니면 그에게 잘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그 표징 — 곧 쾌활함 등 — 이 다른 사람에게서 그대를 그토록 기쁘게 한다면, 어찌하여 그대 자신의 영혼 안에서는 훨씬 더 달콤하지 않겠는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되, 그 사람이 무엇을 주었기 때문에 혹은 줄 것이기 때문에 준다면,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다. 평화와 사랑에 관한 그대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대가 그만큼 사랑한다면, 사랑 자체에 의해 강요된다면, 꾸짖고 때리라. 그렇지 않게 행한다면 그대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행하시기를 바라는 그 정신으로 다른 이들에게 모든 일을 행하라.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로마 5:5). 그러나 그대는 현세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면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 안에 부어지는 것은 현세적인 것들을 통해서이지, 성령을 통해서가 아니다. 이렇게 부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탐욕이다.

보라, 그대의 직무는 그대가 수도원장이 되기 전과 다를 바 없다. 기도와 간구와 감정으로 그대가 행하던 것을 이제 행위로 행하기 시작한 것 — 곧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나 행위가 감정 자체를 줄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자극하고 증가시켜야 한다.

그대가 하느님을 향한 정결을 유지하는 그 어떤 일에서든, 그 같은 일에서 이웃을 향한 정의 — 곧 탐내지 않는 것 — 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귀찮은 일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좀처럼 믿지 않는다.


제18장. 천사들의 완전한 정의에 관하여, 그리고 그들의 정의와 우리의 정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누구든 어떤 것을 완전히 향유하며 자기 자신을 잊을 때, 마치 자기를 버리고 경멸한 듯 그것을 향하여 뻗으며, 자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아니라 그것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 자기가 어떠한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지를 — 살핀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우리보다 더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온 힘을 다해 하느님을 향하여 뻗으며, 모든 다른 피조물과 함께 자기 자신을 온전한 주의력으로 뒤에 남기고, 자기를 돌아보는 것조차 합당하게 여기지 않으니 — 그토록 자기를 하찮게 여기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자기를 경멸하고 자기를 잊으며, 전적으로 그분에게로 나아가 자기가 무엇이며 어떠한지가 아니라 그분이 무엇이신지를 살핀다. 그리고 자기를 더 경멸하고 자기에게서 돌아서며 자기를 잊을수록, 더욱 그분을 닮게 되며, 따라서 더 나은 존재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그들의 신랑의 품으로 이끄시고, 우리는 간부 — 곧 세상 — 에게서 떼어 내신다. 천사들은 신랑을 향유하도록 강하고 굳건하게 하시며, 우리는 간부 — 곧 세상 — 없이 지내도록 하신다. 천사들은 직관과 실재 가운데 붙잡으시고, 우리는 신앙과 희망 가운데 붙잡으신다. 천사들에게는 참된 행복 안에서의 완전한 기쁨을 주시고, 우리에게는 환난 중의 인내를 주신다. 천사들에게는 복된 생명을,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귀중한 죽음을. 천사들에게는 자기를 위해 — 곧 하느님을 위해 — 사는 것을, 우리에게는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을. 천사들에게는 자기 선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우리에게는 자기 악 때문에 슬퍼하는 것을. 천사들에게는 기쁜 마음을, 우리에게는 통회하는 마음을. 천사들에게는 정의를, 우리에게는 회개를. 천사들에게는 선의 완성을, 우리에게는 선의 시작을. 나는 확신을 갖고 단언하건대, 천사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보다 더 크거나 더 합당하거나, 더 귀하거나 더 유익하고 따라서 더 바람직하며, 더 아름다운 선물은 받지 못하였다. 이것을 누가 이해하거나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보다 더 큰 것이나 더 나은 것을 가진 자는 하느님보다 더 큰 것이나 더 나은 것을 가진 것이다.


제19장. 영혼의 참되고 내적인 아름다움에 관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의 참된 완전함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대는 자기 종류 안에서 어떤 자연적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갖지 않은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든 줄어들고 결핍되면, 그것은 마땅히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예를 들어, 코가 잘린 사람을 우연히 본다면, 그대는 즉시 못마땅해한다. 인간 본성의 자연적 완전함에 그가 무엇이 부족한지 감지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잎이나 어떤 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참으로 인간의 정신이 어떤 자연적이고 고유한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이것은 있는 한 마땅히 인정받고, 없는 한 정당하게 비난받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도움으로, 그대의 정신에 이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얼마나 부족한지 생각하라, 그리고 이 부족을 비난하기를 그치지 말라. 그러면 영혼의 자연적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그대의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을 다하여" (루가 10:27). 같은 아름다움에는 또한 이웃에게 자비로운 것이 속한다. 어느 정도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만일 그대가 이와 같지 않다면 그 손실은 누구의 것이겠는가? 하느님의 것은 전혀 아니다. 이웃의 것은 아마도 약간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크다. 자연적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빼앗기는 것은 무엇에게나 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장미가 붉기를 멈추거나 백합이 좋은 향기를 풍기기를 멈춘다면, 그러한 기쁨을 사랑하는 이에게 그 손실은 적지 않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자연적이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빼앗긴 장미나 백합 자체에게는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비통한 것이리라.

이성적 피조물의 참된 완전함은 각 사물을 마땅히 평가해야 할 만큼 평가하는 것이다.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평가하는 것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모든 사물은 본성적으로 자기보다 위에 있거나, 옆에 있거나, 아래에 있다. 위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옆에는 이웃이 있으며, 아래에는 나머지 모든 것이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마땅히 평가해야 할 만큼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이 어떠하신 만큼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이 얼마나 크신지 아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그분이 어떠하신 만큼 그분을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이 얼마나 크신지는 그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분의 본질이 우리의 것을 넘어서는 만큼 그분의 자기 인식은 우리의 것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본질이 그분의 본질에 비교하면 무(無)인 것처럼, 우리의 인식은 그분의 자기 인식에 비교하면 눈멀음이요 무지이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가지시며, 자기 자신과 동등한 인식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신다: "아버지를 아는 이는 아들밖에 없다" (마태 11:27). 그러므로 그분만이 자기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가지시듯, 그분만이 자기에 대한 동등하고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다. 오직 그분만이 자기가 얼마나 크신지를 완전히 아시기에 자기가 크신 만큼 자기를 완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제 처음에 내가 세운 정의(定義)로 돌아가 보라. 더 세밀히 검토하면, 이것은 이성적 피조물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만 적용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머지를 생략하더라도, 이미 보여진 바와 같이 그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자기가 크신 만큼 자기를 완전히 알고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면 이성적 피조물의 완전함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 위에 있는 것 곧 하느님과, 동등한 것 곧 이웃과, 아래에 있는 것 곧 짐승의 영 등 — 이성적 피조물이 마땅히 평가해야 할 가치만큼 평가하는 것이다. 얼마나 평가해야 하는지는 이렇게 모으라: 하느님 앞에 아무것도 놓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동등하게 놓이지 않으며, 무한에 이르기까지 그 절반이나 삼분의 일이나 그 어떤 부분으로도 아무것도 비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더 높이 평가하지 말며, 아무것도 같게 평가하지 말며, 무한에 이르기까지의 그 어떤 부분으로도 비교하지 말라. 아무것도 더 사랑하지 말며, 같이 사랑하지 말며, 그분과 비교하여 어떤 부분으로도 사랑하지 말라. 그러므로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다: "그대의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힘과 온 정신을 다하여 주 그대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루가 10:27) — 곧 향유나 의지를 위해 다른 아무것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위에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본성적으로 동등한 것들 — 곧 본성에 관한 한 — 은 모든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자기만큼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위에 있는 것 곧 하느님에 관하여 사랑 안에서 아무것도 앞세우지 말고, 동등하게 두지 말고, 어떤 부분으로도 비교하지 말아야 하듯, 어떤 사람의 구원에 관해서도, 그리고 자기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해야 하거나 겪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 어떤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도 똑같이 해야 하고 겪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대의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것이 옆에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열등한 것들은 이성적 영(靈) 다음에 오는 모든 것 — 곧 동물과 공유하는 감각적 생명, 풀과 나무와 공유하는 몸의 식물적 생명, 금속과 돌과 공유하는 물체적 실체와 그 형상 및 성질이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해서도, 그것과 비교하여 그만큼 사랑해서도 안 되듯, 아래에 있는 것보다 더 적게 평가해서도, 그만큼 하찮게 여겨서도, 무한에 이르기까지의 가장 작은 부분으로라도 아래에 있는 것과 비교하여 하찮게 여겨서도 안 된다. 이것이 기록된 바이다: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1요한 2:15). 이것이 아래에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위에 있는 것을 기쁨으로, 동등한 것을 교제로, 아래에 있는 것을 봉사로 삼을 것이다. 하느님께 헌신하고, 이웃에게 친절하며, 세상에 대해 절제할 것이다. 하느님의 종, 사람의 동반자, 세상의 주인이다. 하느님 아래에 놓이고, 이웃 위에 높아지지 않으며, 세상에 종속되지 않는다. 아래의 것들을 중간의 것들의 유익으로 향하게 하고, 중간의 것들을 위의 것들의 영예로 향하게 한다. 위에 있는 것에 대해 불경하지도, 모독하지도, 신성모독하지도 않으며, 동등한 것에 대해 교만하지도, 시기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으며, 아래에 있는 것에 대해 광분하지도 방탕하지도 않는다. 아래의 것들에게서도, 동등한 것들에게서도 아무것도 받지 않고, 오직 위에 있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다. 위에 있는 것에 의해 각인되고 아래의 것들에 각인하며, 위에 있는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아래의 것들을 움직이며, 위에 있는 것에 의해 감동받고 아래의 것들을 감동시킨다. 위에 있는 것을 따르고 아래의 것들을 끌어당긴다. 그것들에게 소유되고, 이것들을 소유한다.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의 모상으로 환원되고, 이것들을 자기의 모상으로 환원시킨다.

우리는 이 삶에서 이 완전함을 향해 노력하지만, 다음 삶에서가 아니면 완전히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더 열렬히 갈망할수록 그때 더 충만히 달성할 것이다. 그때에는 정신 안에 하느님으로부터가 아닌 움직임이 없을 것이고, 몸 안에 영혼으로부터가 아닌 움직임이 없을 것이며, 따라서 영혼 안에도 몸 안에도 하느님으로부터가 아닌 움직임이 없을 것이다. 죄 — 곧 의지의 왜곡 — 도, 죄의 벌 — 곧 육신의 부패와 고통과 죽음 — 도 없을 것이다. 벌거벗은 정신이 벌거벗은 진리에 매달릴 것이니, 그것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말도, 어떤 성사도, 어떤 비유도, 어떤 예시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사람이 자기 형제를 가르치며 '주님을 알아라' 하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이에서 큰 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 31:34). 모든 이가 "하느님에게 배운 자들이" (요한 6:45)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20장.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앞서 말한 완전함을 당신 자신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셨는가.

이 덕행들, 혹은 정의의 줄기들은 지금 이 가멸적 삶에서도, 영혼이 매우 정결하다면, 하느님의 진리와 지혜 자체 안에서 영혼 스스로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 영혼이 불멸하고 영원할 뿐만 아니라 육신도 부활에서 그러할 것임을 볼 것이다. 부활 자체도 거기에서 — 곧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 안에서 — 분명히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이 자기의 불결함 때문에 이것을 할 수 없었으므로, 인간 정신이 말씀에 결합되었으니, 이 정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충만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전적으로 일치하고 닮게 되었으며,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전적으로 각인되었다 —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를 당신 마음 위의 도장으로 찍어 주십시오" (아가 8:6) — 마치 밀랍이 도장의 모상으로 눌리듯 온전히 그분의 모상으로 환원되어, 당신 자신 안에서 그분을 우리에게 보이시고 알게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인간 영혼도 볼 수 없을 만큼 눈멀었으므로, 인간의 몸도 또한 더해졌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해 보라: 하느님의 말씀, 인간의 정신, 인간의 몸. 우리가 첫째를 잘 볼 수 있었다면, 둘째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둘째를 볼 수 있었다면, 셋째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첫째도 둘째도 — 곧 하느님의 말씀도 인간의 정신도 — 볼 수 없었으므로, 셋째 곧 인간의 몸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우리의 외적 영역에서, 이것을 통해 언젠가 우리를 당신의 내적인 것으로 이끌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진 이성적 영혼이 말씀에 결합되었으니, 그 육신을 통해 우리의 가르침과 교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행하시며 겪으셨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위에서 논한 것들 — 곧 하느님께 대한 헌신, 이웃에 대한 친절, 세상에 대한 절제 — 이 가장 완전하게 발견되었다. 하느님보다 아무것도 앞세우지 않으셨고, 아무것도 동등하게 두지 않으셨으며, 아무것도 어떤 부분으로도, 아무리 작은 부분으로도 비교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말씀하신다: "나는 항상 그분의 뜻 — 곧 아버지의 뜻 — 을 행한다" (요한 8:29). 그리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가장 완전하게 사랑하셨다. 당신 아래에 있는 것 — 곧 이성적 정신 아래에 있는 것 — 가운데 아무것에도 아끼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이웃의 유익으로 돌리셨으니, 감각적 생명과, 육신을 유지하는 식물적 생명과, 육신 자체를. 우리를 위해 가장 날카로운 고통을 견디셨고, 식물적 생명에 대항한 죽음을, 육신 자체에 대항한 상처를 견디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서는 인간의 아들이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실 만큼의 절제와 경멸을 가지셨다. 아래의 것들에게서도, 중간의 것들에게서도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고, 오직 위에 있는 것 — 곧 인격의 일치로 결합된 하느님의 말씀 — 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셨다. 성사에 의해서도, 말에 의해서도, 예시에 의해서도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말씀의 현존에 의해서만 이해하도록 가르침받으셨고 사랑하도록 불붙여지셨다. 이 영혼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께서 삼중의 방식으로 — 곧 성사와 말과 예시를 통해 — 무엇을 행해야 하고, 무엇을 견뎌야 하며, 무엇을 통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사람은 하느님 외에 아무도 따라서는 안 되었으나, 사람 외에 아무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취해졌으니, 따를 수 있는 분을 따르면서 따라야 하는 분도 따르게 하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하느님 외에 아무에게도 동화될 수 없었으나, 사람 외에 아무에게도 동화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사람이 따를 수 있는 사람에게 동화되면서 따르는 것이 유익한 하느님에게도 동화되게 하기 위함이다.